How to inhabit Cyber Culture?

How to inhabit Cyber Culture?

김 성원(미술비평)



디지털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인터넷 통신망의 위력은 우리의 사고 방식과 라이프 스타일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90년대 IT산업의 급성장을 경험하며 네트워크 사회에서 성장한 N세대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은 커넥팅 모드(connecting mode)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인터넷에 접속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항시 모바일 폰에 연결되어 있는 라이프 스타일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네트워크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광통신 네트워크의 무한대 공간이 우리에게 더 이상 가상이 아니게 되었고, 가상과 실제가 뒤섞이면서 안정적 혹은 고정 모드에 있던 우리의 사고체계는 유동적이며 가변적 모드로 전환되었다. 피에르 레비의 <컬렉티브 인텔리젼스>라는 저서에 따르면 "사이버 스페이스의 테크노컬쳐 환경의 출현은 전달(transmission)과 수용(reception), 그리고 구성(composition)과 해석(interpretation)의 경계구분을 모르는 새로운 유형의 예술이 생겨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라고 말하고 있다. 노재운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 컬쳐를 기반으로 그것이 만들어 낸 그 모든 특징과 환경들을 반영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그 작업이 보여지는 공간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간에 바로 우리 사고체계를 '커넥팅 모드'로 전환시키는 일종의 '도구' 나 '상황'이 되는 것이다. 노재운은 사이버 스페이스를 서핑하며 원하는 정보들을 다운로드 받아 그것을 재단하고 재구성하며 동시에 재해석하는 '사이버 유저(user)'다. 여기서 유저(user)는 생산자이자 곧 소비자가 되며, 전달자이자 수용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작업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작가가 재현(represente)하는 '공간'으로 들어가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레이어들을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또 다른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의 '유저'가 되어야 한다. 노재운 작업에 있어서 새로운 제안은 바로 사이버 테크놀로지 출현으로 인한 아트워크(생산)와 그것의 감상(소비)의 변화된 형태를 가시화 하고 인식시키는 데서 찾아 질 수 있을 것이다.


발화하는 바이러스

수퍼 인터페이스, 남한3부작, 무빙 웜 오사마 프로젝트로 구성된 < Skins of South Korea>에서 노재운은 인터넷에서 축출한 'Osama Worm'이란 바이러스를 오프라인에 퍼트렸다. 이 바이러스는 무의식 중에 감염될 수 있고, 일단 감염되면 백신은 없으며, 감염 자체를 쾌락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조금은 무시무시한 바이러스다. 전시장에 놓여진 자그마한 은색 공 형태를 우리는 어떻게 감상 혹은 해석해야 할까? 바이러스 이름의 의미로 아니면 외형적 형태로? 이것도 저것도 이 바이러스의 적절한 감상법은 아니다. 여기서 바이러스의 이름인 '오사마 웜'에 직결될 수 있는 모든 정치종교적 이슈들에 그리 심각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노재운의 바이러스 활동은 오사마 빈 라덴의 이슈를 다시 한번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저 네티즌이 흔히 사용하는 닉네임쯤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프라인에 상륙한 노재운의 '오사마 웜'의 첫 번째 역할은 우리를 현실과 가상을 연결할 수 있는 접속 모드로 전환시키게 되며, 우리는 곧 '유저'가 된다. 일단 실제와 가상이 연결되면 그 세계에서는 현실의 모든 고정관념, 이념, 규칙, 제도 등이 사라지게 된다. 즉 우리는 자유자재로 또 다른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소스와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소재(소스)의 서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볼사리노, 일본 정찰기, 좀비, 카메룬의 축구영웅, 북한 소녀 등이 이슈의 심각성과는 무관하게 동일한 비중으로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축출된 오사마 웜이 오류동의 재개발 현장에 등장하는 순간(Moving Worm Project) 오류동 재개발 '현실'은 '픽션'으로 전환된다. 꿈이 존재하지 않는 암울한 현실이 픽션으로 전환되며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바로 노재운 바이러스가 발화하는 순간이며, 노재운 작업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이다. '오사마 웜'은 버려진 공장과 컨테이너나 재개발 현장을 고발하는 리포터가 아니라 가상을 현실화하고 동시에 현실을 허구화하면서 우리의 상상력, 현실에 기반을 둔 보이지 않는 어떤 세계에 대한 열망을 가시화한다. '무빙 웜 프로젝트'에 올라와 있는 이미지들은 허구적 내러티브가 가능한 어떤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 '공간'은 픽션의 내러티브 생성이라는 '액션'을 통해서 가시화되는 것이지 사진 이미지에 안에서 찾아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작업의 컨셉은 사진 속에 있는 재개발이 아니라 현실의 이면을 활성화할 수 있는 상상력과 그것을 위한 우리 인식체계의 방향 전환에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스킨 / 이미지-블로그

예술의 영역과 개념이 확장되고 변화했다고 하지만, 예술은 여전히 '재현(representation)' 활동이 지배하는 영역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재현'의 변천사를 두 눈으로 경험한 오늘날 아티스트는 과거와 같은 방식의 '재현'을 답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술에 있어서 '재현'은 곧 어떤 이미지의 생산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미지는 물질적일 수도 있고 비물질적일 수도 있다. 노재운의 이미지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역의 '이미지들'을 가시화하고 활성화 할 수 있는 일종의 '인터페이스'라고 할 수 있다. <Skins of South Korea>의 '수퍼 인터페이스'는 '사우스 코리아'라는 소재를 우리 스스로 재구성하고 활성화 할 수 있는 '이미지'들의 모임이다.

이 이미지들은 "주로 한국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기억이나 인물들일 수도 또는 우리의 일상적 삶과 관련된 특정한 기호들이거나 세계의 어떤 국면을 드러내는 이미지들"(바흐레토릭과의 대화에서)이다. 우리는 매끄럽게 처리된 플랫한 '이미지-스킨'들을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며 각자 고유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간다. 거기에는 실제에 가려진 가상, 가상에 가려진 실제, 진짜와 가짜 사이의 애매모호하고 민감한 영역, 공상과학 속의 현실, 현실 속의 공상과학 등의 레이어들이 공존하고 있다.

비밀라키 넷(Vimalaki.net), 닥터 노 코믹스(Dr No Comix), c12픽처스(c12pictures.com)에 올라와 있는 이미지들을 보면 그 이미지의 블로그적 존재 방식에 주목하게 된다. '공장과 컨테이너들'이나 '무빙 웜'의 이미지들은 뭔가 걸러지고 정제된 이미지들이 아니라 순간 순간 포착되는 미완성 이미지들의 시간적 나열이다. '지금 여기에'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 내용은 의도적으로 함축적이며 동시에 친숙한 발언들이며, 동시에 작가의 일기장과도 같은 이미지-블로그를 통해서 우리는 작가의 삶과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비말라키 넷을 통해서 보여졌던 노재운의 단편 작업들은 의미 상으로 보면 서로 간의 연결고리나 소재선택의 그 어떤 일관성도 없어 보인다. 이슈의 중요도에 따른 서열도 없고 구성에 있어서 논리적 짜임새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마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매일 조금씩 두서없이 써내려 가듯, 겨울나기에 대한 설명을 하는 대북한 남한 방송과 일본의 최첨단 조기경보기 에이왁스가 공존하며, 키워드 서핑을 하다 발견한 북한 소녀응원단의 사진들과 그것을 모방한 남한 소녀들의 모습이 합성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인터넷에서 수집한 폴란드의 체조영웅 아카타 로벨, 프랑스의 석학 보드리아르, 좀비 이미지들은 블로그적 존재 방식을 통하여 사적인 공간과 공공영역과의 소통하게 되며, 익명의 블로거들에게 가상과 실제에 존재하는 조각난 파편들 사이의 '블랭크'들을 메꾸고 재구성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어떻게 구성하냐에 따라서 이 파편들의 모임은 공상과학의 모양새를 한 대장정 휴먼 드라마로 전개될 수도 있고, 무미건조한 일상적 에피소드처럼 존재할 수도 있다. 능동적 '유저'만이 체험할 수 있는 이 재구성과정은 퍼즐게임과도 같고, 추리소설을 읽는 순간과도 같으며, 때로는 망망대해를 무작정 항해할 때 느끼게 되는 아득함과도 같을 것이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