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이든 무엇이든지

 스위스의 검은 황금 Black Gold in Switzerland, drawing, 2006


노재운 - 디지털이든 무엇이든지


컬처뉴스 / 생생토크 2006-02-22

노재운은 2004년 개인전 이후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다. 잡지에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내가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그는 자신의 개인전 이후 받았던 오해들에 대해서 매우 불편해 했다. 물론 그 개인전 이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국내외 기획전에 참여하게 되긴 했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의 작업들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북한 미녀 응원단의 이미지를 요들송을 배경으로 편집하고 오사마 웜이 한국에 출몰하거나 혹은 다국적 기업의 로고가 쌍둥이 빌딩 테러와 중첩되는 등 어떤 편향적 읽기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태도가 미술계의 상투적 범주화로 재단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다른 정치적 우화를 우리에게 언급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는 이러한 그의 우화들에 접근하기 위한 다른 한 발자국일지도 모른다.

김장언(이하 김) 지난 2004년 개인전 이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전 당시 저널리즘에서 촉발된 오해 이후, 자이든 타이든 노재운 씨는 어떤 경향적 작가로 범주화된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노재운이라는 작가에 대한 평가는 미디어 아트와 경향적 미술의 중간 지점에서 반복되는 인상을 받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전형적입니다. 왜냐하면, 한 작가가 웹을 다루면 웹 아티스트라고 쉽게 규정하는 방식이나 혹은 누가 그 작가를 선점하느냐에 따라서 작가에 대한 성격이 규정되는 관행을 그대로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노재운이라는 작가는 이 두 범주화에 대해서 스스로 미끄러져나가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재운이라는 작가의 작업을 보면 동시대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정치적 입장과 새로운 미디어 혹은 새로운 미디어적 태도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노재운씨에게 새로운 미디어 환경, 정치적 상황 그리고 예술은 어떤 위치에 놓여져 있는 것인지요?


노재운(이하 노) 저널리즘에서의 오해라.. 작가에게 윤리적 하자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비평도 오해도 아닌 일종의 인신공격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런 상식 이하의 짓에 반응한 것 뿐 이었습니다. 작가를 마치 야바위꾼 정도로 보는 그런 시선.. 시시하고 악의적이죠.. 그리고 너무 익숙한 것이라 사실 질립니다. 단순한 범주로 작가를 환원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의 문제, 혹은 한국미술 지형이 확보하고 있는 시야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미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오히려 반증해줄 뿐이죠. 그래서 내가 어떤 범주에 속할까 스스로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또 그런 노력을 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한국의 비판적 미술의 흐름과 만나고 교류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내 작업 안에 공유할 만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죠. 또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도 교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범주화를 가능케 하는 정교하고 섬세한 언어와 태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제 작업은 항상 열려있으니 마음을 넓게 가지고 접속을 시도하셔도 됩니다.. T^T=b ..


새로운 미디어 환경은 저한테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물질적 외형이나 조건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작동원리, 방식이 나와 통하는 게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만약 현재의 내 작업에 어떤 정치성이 출현한다면 내가 하는 작업들의 이미지에 재현되는 것 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더 있을 것입니다. 즉, 작업을 사유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직접 만든 개인 미디어, 즉 웹 사이트 등을 통해 살아가게 하는 것 등 말입니다. 이런 식의 미디어-자기화는 다른 형식과 맥락으로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고 실제로 온-오프라인을 뛰어넘는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서로 만나거나 증폭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이라는 것도 이런 변화 속에서 스스로를 재정립하고 있지 않을까요? 물론 꼭 긍정적인 모습만은 아니지만.


김/ 저는 노재운씨의 작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상에 등장하는 새로운 주체들의 삶의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드러나는 주체들의 ‘정체성의 정치학’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또한 폐인 혹은 마이너리티의 감수성들이 새로운 미디어와 사회 속에서 형성되고 발화하는 감수성과 그들의 삶의 방식을 언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유형들이 엽기나 B급 등으로 쉽게 규정되고 단일한 유형의 감수성으로 표상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노재운씨와 당신의 작업을 다른 삶의 조건들 혹은 형태들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문화 주체로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노/ 새로운 주체들에 대한 것.. 그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떤 행복한 정서들을 잠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 짧은 시기를 알고 있다니.. 언젠가 동료 작가와 함께 동시대 비평가로서 당신의 그런 섬세한 시선을 높게 산적이 있었는데 공식적으로 좀 더 활발히 활동할 생각은 없는지.. ^^;; 어쨌든 그것은 지루하게 연장되는 ‘끝’을 반복하는 것 보다는 어떤 ‘시작’을 사유하는 태도 같아서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이런 감수성들이 무시무시한 자본의 마케팅 차원에서 단일화되는 것 못지않게 새로운 세대론의 유형으로 굳어져 단순하게 정의될 수 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지털로 표상되는 세상의 바다-그렇지만 이 바다는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디지털이 가시화시켰을 뿐-위로 스스로 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겠죠. 그렇다고 어디에 닿을지도 별 관심도 없는 거 같습니다. 단지 여행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항상 임시적인 자신의 좌표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면서 남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추적하고 수용하는 세상의 언어들은 어떤 모습을 띄게 될까? 난 그것도 매우 궁금합니다.


김/ 최근의 노재운씨의 작업을 보면, 사회 문화적 상황에 대한 사적(私的) 알레고리를 생성해 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사회 문화적 상황이라는 것은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 얻어지는 정보의 풍경에서부터 도시 혹은 작가 자신의 살아가는 실재 삶의 공간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 취향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작가는 컨테이너, 핸드폰의 전화벨소리, 좀비들 혹은 폴란드의 역사(力士), 아가타 우로벨 등과 같은 구체적 대상 혹은 사건들 속으로 자신의 알레고리들을 접합시키는 인상을 받습니다. 솔직히 노재운씨의 대상들 혹은 사건들은 매우 정치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것이지만, 그 너머의 어떤 개인적 우화를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정치 사회적 문제가 거대한 사회적 이론이나 철학적 담론 속에서 형의상학적으로만 촉발되기보다 오히려 개인의 삶의 방식 속에서 돌출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재운씨의 이러한 사적 알레고리들이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아직까지 저에게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인식되지는 않습니다.


노/ 가끔씩 인과율이나 기승전결 없이 지속되는 끝없는 영화를 상상해 보곤 합니다. 제게는 세상의 진짜 모습은 바로 그렇게 파악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실, 제가 만든 장면들을 임시적으로 편집해서 어떤 의미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제 작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실은 저도 알아가야 합니다. 혹은 점점 더 어떤 혼돈 그 자체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면 이것은 이상한 말일까요? 작업에 쓰인 이미지 또한 다른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 우선은 그 자체로 고도로 응축된 어떤 순수한 강렬함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죠. 물론 이 선택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것이지만 너무 상식적인 의미이겠죠. 분명한 것은 좀비들, 아가타, 전화벨.. 그리고 기타 다른 것들은 보편적인 기준으로는 별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내 안에서는 아무런 갈등 없이 서로 대등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저의 힘인 거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호하게 보이거나 분열적으로 보이는 것을 우선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렵니다.. 그래야 뭔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느낀 그 불명확한 우화 또한 언젠가 나한테 말해주길 바랍니다. 흥미있을 것 같습니다.


김/ 저 스스스로도 그러한 알레고리를 좀더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솔직히 제가 노재운씨의 작업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워하는 것은 바로 노박사 코믹스입니다. 이제는 인터넷에서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첫 번째 뇌>는 매우 인상적였습니다. ‘예술가’다 ‘만화가’다라는 그러한 상투적인 이분법을 넘어서 저는 노박사의 서사구조 및 시각형식이 매우 유쾌하면서도 통렬하게 동시대 문화의 어떤 감수성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하드 보일드(hard boiled)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엉뚱한 쉐기 독 스토리(shaggy-dog story) 일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감수성이 자신의 작업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요.


노/ 개인적으로 하이퍼 보일드(Hyper Boiled)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유명사가 아니니 다른 사람들도 이 말을 쓸 필요는 없으나 많은 부분, 약간의 상상과 함께 내 작업을 잘 지시하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녀의 첫번째 뇌>는 사실은 더 방대한-거의 우주적인-공상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 뒤로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그거 다 그릴려면 내가 만화가가 되어야 하는데..엄두도 안나고 해서 프롤로그 하나만 하고 그만뒀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식으로든 그 이야기의 완성판을 만들고는 싶습니다. .. 음.. 그런데 미술작업을 하는 데서도 공통되는 정서가 작용되는 거 같기도 합니다. 관심의 영역과 이야기하는 형식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음.. 아뭏든 그 만화를 인상 깊게 본 사람들이 꽤 있던데 계속 그려볼걸 그랬나..


김/ 오는 3월에 개인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전을 위해 계획하고 있는 작업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노/ 어쩌면 그 불명확한 우화의 정체가 약간은 드러날지도 모르겠습니다. -.-;; 새로 보는 작업들도 있을 것이고 봤던 것도 있을 것이고 또 약간 변형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작업들은 ‘스위스의 검은 황금’이라는 전시를 위해 잠시 엮일 것입니다. 사실, 이 제목을 생각하는 게 더 어려웠습니다. 이번 개인전을 위해 내 작업을 어떤 식으로 연결 지을지 혼란스러운 (그러나 재미있기도 한) 시간을 보냈는데 이 문장을 생각하자 그런대로 풀렸습니다. ‘스위스의 검은 황금’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도 궁금합니다..(구기동으로 새로 둥지를 튼 대안공간 풀에서 3월 8일부터 3주간 개인전이 있습니다. 이 인터뷰를 보시는 분들 많이들 보러 와주세요)




노재운은 1971년생이며 2004년 개인전 ‘스킨오브 사우스 코리아’(인사미술공간, 서울)를 열었다. ‘새로운 과거’(마로니에 미술관, 서울, 2004), ‘배틀오브비전스’(다름슈타트쿤스트할레, 독일, 2005)등의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웹사이트 http://www.vimalaki.net/, http://www.cloudy12pictures.com(현재 c12p.com), http://www.time-image.co.kr(현재 운영되지 않음)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2006년 3월, 두번째의 개인전, ‘스위스의 검은황금’(대안공간 풀, 서울)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