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운, 불한당들의 세계사


허블 울트라 딥필드 Hubble Ultra Deep Fields, 2009


노재운, 불한당들의 세계사*


현시원(미술이론)



바위_ 남자는 하염없이 걷는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그는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수없이 많은 중국의 여자 해적과 한국전쟁의 어린 용사들과 작별인사를 하며 여기까지 걸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가 느끼는 것은 기암괴석의 흔적이다. 땅은 평평하지만 그 옆에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그의 시선을 가린다. 그 가려진 시선 사이로 무한한 판타지는 갈 곳을 잃는다. 작고 큰 바위들은 병이 든 것처럼 물렁거리는 듯 보이다가 다시 바위는 도시의 고층 빌딩들처럼 두려울 것 없는 표정으로 그에게 밀려든다.

밤인지 낮인지, 며칠인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이 순간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공간 속에서의 이동을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다. 남자는 시작과 끝이 분명한, 누군가가 작정하고 만들어 놓은 거대한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마음이 전혀 없다. 남자를 보던 영화감독은 고민한다. 이 남자에게 바위의 공간은 적절한가. 아니 적절하지 않다. 이 남자는 어떤 상태 속에 빠져있는 것 이외에는 능동적으로 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무엇 하나를 끈질기게 오래 잡고 있는 모습도 아직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영화감독은 생각한다. 이 남자를 기암괴석의 만화와 수묵화 속에서 빼어내 광활하고 막막한 바다 속으로 내보내기로 한다.

태평양_바다는 아카이브다. 지금 생성되고 있는 것과 남아있는 잔여물들과 시체와, 여러 개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던 죽지 않은 사람들이 바다 속에서 꿈을 꾼다. 남자는 바다 한가운데에 서있다. 그 위에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육지에서 있었던 많은 역사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지금 남자는 바다에 있지만 바다에 있지 않은 것과도 같다. 육지에서 그는 주변의 많은 것들을 수집해 왔다. 남자는 2009년 뉴스 자료화면을 장식했던 하얀 비둘기의 이미지와 흑백 영화 속에서 독백을 하던 여자들을 떠올린다. 여자는 그랬다. 노래를 했다가 춤을 췄다가 팔을 크게 벌렸다가, 그래서 몽타주 효과를 사랑하는 영화감독에게 애지중지 신뢰를 받았다. 어떤 대사도 읊조릴 마음이 없는 남자는 바다에 떠다니는 파편들처럼 그 자신이 파편이 되어 바다 위를 배회한다. 그는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난파되어있는 것들의 조각을 바라본다. 바다는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를 못 만나게 땅덩어리를 잘라내 버린 걸까. 궁금하다기보다는 혼란스럽다. 산산이 다 부서져서 형체를 완벽하게 잃은 상태는 아니지만 작게 난파된 조각들이 가끔 파도에 휩쓸려 어쩌다가 서로 만나기도 하는 그런 상태의 바다다.

남자의 배회를 지켜보던 영화감독은 운동하는 바다를 화면에 어떻게 표현할지 설계도를 그리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바다의 파도치는 모습이 삼각형, 마름모꼴, 가로 줄 무늬의 반복 중에서 어떤 형상에 가장 가까운지 도무지 선택할 수가 없다. 기본 화면을 규정하는 도형이 생각나지 않는다. 영화감독은 하얀 파도 사이로 뛰어든 순교자 같은 정념을 표현하고 싶다. 남자의 착각과도 같은 순간적인 정념 아니면 남자를 향한 어떤 여자의 독백을 이용해서라도. 하지만 이쪽과 저쪽의 연결에 관해 쉽게 말해줄 마음은 없다.

검은 머릿속_남자는 영화감독이 걸으라고 해서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반항심은 있었지만 처음엔 다른 사람과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이 신선했고 좋은 에너지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배회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영화감독이 이제는 남자의 머릿속 풍경까지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달음은 갑자기 하지만 일면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나듯이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남자는 보르헤스(Jorge L. Borges, 1899-1986)가 쓴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등장하는 여덟 명의 불한당들과 그 불한당들이 살았던 13세기, 15세기를 뒷받침해주는 수없이 많은 각주와 원전들까지 탐독했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시간의 무대 위를 배회했는가를 깨달았다. 그리고 2009년 인터넷 공간에 그 갑절이 넘는 불한당들이 제 소명을 다하며 필사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배회의 흔적이 쌓이면 거대한 이야기 모음이었다.

인터넷의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에서는 바위나 태평양에서 느꼈던 이상한 공간에 대한 육체적인 반응은 없었다. 인터넷을 클릭하면서 남자는 무서운 속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몸은 의자 위에 있었지만 그의 뇌는 걷잡을 수 없는 먹구름처럼 둥둥 지구 위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사이버스페이스에 3.8선도 넘어보았고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옛날 영화의 심리적인 대결 구도 속으로도 들어가 보았다. 배경음악이 때로는 웅장하게, 때로는 몰입에 방해가 안 될 정도로 크기를 바꿔가며 울려 퍼졌다. 이곳에서 침묵은 없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장벽도 없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곳은 없었다. 막연한 공간과 때로는 색깔도 선명한 구체적인 공간이 머리 위에 떠다녔다. 남자는 이 공간에서 저 공간을 통과할 때에도 어떤 땀이나 얼룩도 흘리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떤 사건을 완결시키지 않아도 1분 1초도 쉬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얼굴을 보며 말을 걸고 싶은데, 얼굴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는 남자를 끌고 가는 힘센 이야기에 쉽게 동화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는 사이버스페이스, 그러니까 자신의 검은 머릿속에서 우주도 보고 지하 세계도 본다. 쉬었다가 끝없이 탐험을 계속한다. 오늘 밤에도 잠이 들 시간이 없다. 영화감독은 혼자 움직이는 그를 보면서 과거에 이미 보았던 어떤 이미지 같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그의 시간이 가고 있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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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작가 노재운이 만든 작품 속 공간에서 살아있는 가상인물인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작성한 에세이다. 남자는 영화 속 가상 인물일 수도 있고, 영화감독에 의해 편집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의 설계도일 수도 있다. ‘바위’ 부분은 2010년의 개인전 <About Time>의 평면 작품들을 ‘태평양’ 부분은 2009년 <에르메스 미술상 전>의 작품들을, ‘검은 머릿속’ 부분은 2006년 <스위스의 검은 황금> 및 작가의 웹사이트를 모티브로 했음을 밝힌다.